1. 작가와 회화
2010년 1월. 한국에 들어오기까지 5년 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동남아시아에서 호주, 뉴질랜드에 이르는 곳을 돌아다니며 생업과 떠나기를 반복하는 5년 동안, 한국을 떠날 때 이별을 고했던 [왜 회화인가?] 라는 질문에 대해 스스로 초연해 지고자 노력했다. 끊임없이 나를 괴롭혔던 순수미술에 대한 이상적 회의감과, 현실의 삶이 가져다주는 실질적 상실감들 사이에서 균형 감각을 가져야 한다는 이[폭력적인]사실이 작업과 삶 모두를 왜곡시키고 있음을 몸소 체험했던 시간들 이였다.
어찌 보면 20세기 이후 끝나버린 듯한 자본이 잠식해버린 순수미술에 대한 이야기는 수많은 작가들의 상실된 의식과, 타협해 버린 미술 시스템 속에서 정규 교육과정을 거쳐 오던 작가에게 지속적인 회의감을 안겨주었으며, 개인적 어려움이 겹친 정규 교육기관의 과정은 순수한 작가의 의도를 좌절시켰고, 그 어떤 것도 보장받을 수 없는 현실에 작가를 던져 놓은 채 모방된 철학과 모호한 개념 속으로 도망친 예술의 거짓성만을 뚜렷이 체험하게 해 주었다.
나는 내면에서 끊임없이 되뇌어지는 질문들을 캔버스 속에 녹이며 작가가 내부에 있는 맥락이 사물과의 관계에서 이미 망각 된 채로 떠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우리에게 여전한 질문꺼리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다른 표현으로 존재함을 통해 부재를 감각하고, 부재를 통해 존재를 발견하는 과정에서 표면적으로 드러난 표현보다 훨씬 상위에 위치한 맥락을 있는 그대로 감각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표현방식이 전통적인 회화의 흐름이 따라온 직접적인 해석과 연출, 초현실주의적인 상징적 조형과 형상 또는 맥락보다 괴리적 성향이 강조됨으로써 작품에 과도한 철학적 개념에 기대게 되는 개념미술의 형태가 되는 것을 경계한다.
또한 탐색하는 인간 내면의 메시지가 특정한 상황이나 인물을 대상으로 한 직접성을 띄지 않았을 때, 이것을 만나는 공감의 무게가 놀랍도록 뜨거울 수 있음에 주목했다. 강렬하게 느껴지는 맥락성은 결코 자세하고 구체적인 설명 속에서 얻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이해(understand)이지 공감(empathy)의 영역으로 확대 되지 못한다. 현대 미술은 논리적 조형성과 철학적 의미에 크게 의존하며 작품을 통해 본질적 정서를 교류하는 작가와 관객의 소통의 기회에서 크게 멀어져 왔다. 나는 관객과의 소통이‘설득의 과정 없이’가슴속에서 순간적으로 일어나는 화학작용과 같기를 희망하고 있다.
2. 작가의 시선
2-1. 보여지는 것 사이의 맥락에서 형성되는 공진성(共振性, resonance).
물리학에서 공진성이란 모든 물체는 고유 주파수를 가지고 있으며, 일반적으로는 진원지에서 멀어질수록 진동이 약해지지만, 공진현상이 일어나면 진원지에서 멀어질수록 진동이 강해지는 현상을 말한다. 이러한 공진 현상의 특징은 중간 매개체가 없으며, 각각의 개체의 고유 성질이 그대로 유지된 채 일어난다는 점이다. 심리학적으로 보면 공감(empathy)의 개념이 존재하는데, [함께느끼다]를 의미하는 동감(sympathy)과 다른 점은 바로 개인 내부의 의식에 보다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다른 감정적 전이현상에 비해 전의식적(Preconscious)경향이 강하다. 즉 논리의 영역보다 훨씬 앞에 위치하는 직관적 감정교류의 방식이라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공(共)의 개념은 공통적으로 두 객체 사이에 매개체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 그 어떤 매개체를 통한 전달보다 강한 연결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작가와 작품의 소통방식의 한 축을 이해해 볼 수 있다. 작가는 작품 내에서 매우 사실적이고 직접적인 표현방식으로 사물을 표현하고, 의도적 조형성과 네러티브에서 멀찌감치 떨어진 채 무감각한 듯이 건조한 어투로 이야기하고 있다.
이 같은 표현들은 결코 직접적인 설명으로 들어가지 않은 채 마치 날것(Raw)과 같은 형태로 전달되어 관객 내부에서 질문 또는 그 외의 정서적 형태로 재조립 된다. 이것은 결코 언어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관객 내부에 공진을 일으키게 된다. 나는 이러한 공진의 주파수를 관객에게 던지고 있다.
2-2. 본질적 자아를 감각하는 삶의 태도
인간의 삶이 가진 복수의 감정이란 온전히 개인의 내적 자아에서 나온다. 동일한 대상은 결코 보편적 정서를 필연적으로 동반하지 않는다. 작가의 작품에서 나타나는 무표정한 얼굴, 미소띤 얼굴, 관객을 바라보는 인물의 모습 속에 드러나는 정서는 누군가에게는 외롭거나, 그립거나, 슬프거나, 혹은 기쁘거나, 행복할 수 있다. 이것은 분명이 타인의 얼굴이지만 그곳에서 우리는 그것을 감각하는 스스로의 태도를 발견할 수 있다. 이것은 분명 각자의 삶속에 내제된 욕망과, 층층히 쌓여온 사건들이 만들어낸 화학 작용이다. 작가가 던지는 삶에 대한 물음은 타인과의 관계에 대한 직접적 물음이며, 그것은 관객이 무엇을 찾으려 하지 않아도 내면에서 형상화 될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또한 그것은 내가 사무치게 느꼈던 삶의 내밀한 움직임을 다음과 같은 메모에서 이야기 할 수 있을지 모른다.
“사랑하는 이의 부재에도, 누군가의 깊은 우울증 고백후의 자살에도, 돌고 도는 말들이 만들어낸 허상이 거리를 버젓이 누비고 다녀도 우리네 삶은 그렇게 고요하게 흘러간다. 내게 눈부신 거리는 때로는 너무나 낯설고 잔인했으며, 때로는 거리에 동화되고 싶은 욕망에 휘감겼으며 때로는 차라리 누구든 무심히 바라보고 지나칠 수 있는 풍경이 되길 바랐다.”(2010)
2-3. 의식적 의식의 경계
기억은 개인적으로는 너무나 [현실적] 하지만, 객관화 되는 과정에서는 [비현실적]의 경계로 쉽게 빠져든다. 작가는 이러한 면이 개인의 삶에 관한 독백이 아닌 작가의 주관적 범위를 벗어나 공감할 수 있도록 하는 통로로 존재하고자 하고 있다. 결국에는 이러한 경계에 존재하는 작업은 무언가에 대한 변화의 메시지로써 관객에게 다가가고 있지만, 그것이 의도적으로 결론을 끌어내는 공식으로써가 아닌 모두의 삶이 여전한 것이며, 관객과 작가가 완전히 다른 의식 속에서 손을 내미는 행위로 귀결되기를 희망한다.
3. 작가의 현재와 미래
작가에게 순수성은 선택의 영역인가 하는 물음을 다시 던져본다. 이것은 현대 자본주의 시스템이 마치 인간에게 선택의 자유를 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상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맥 빠지는 현실과 맥락을 같이 한다. 이것은 주지도 않은 선택권에 대한 책임까지 전가해 버리는 극도로 폭력적인 형식으로 비춰졌다. 작가는 이러한 맥락을 드러내기 위해 선택과 강요를 일상과 비 개연성이라는 소재를 통해 탐색함과 동시에, 폭력 자체를 둘러싼 거대한 묵인을 건조하게 표현함으로써 이러한 불편함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자 하고 있다.
또한 나의 작업은 의도적인 공간의 재조립은 과거와 현재, 인물과 풍경이 충돌하며 콜라주와 같은 형태로 메시지를 형성한다. 때문에 작품은 기억의 재구성이면서 동시에 초현실적 표현으로 비춰 지기도 한다. 작품은 이러한 상황에 연결고리 상에 존재하여, 두 개의 맥락을 잇는 곳에서 공존하고 있다. 이는 작품이 장식과 철학적 개념을 억지로 드러내려 하는 기성 작가들과 근본적인 출발을 달리하는 큰 부분의 하나이다.